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제2공화국 (문단 편집) == 제2공화국 체제의 이념 대립 == 스페인 좌파 공화주의자(IR, UR)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반면 우파 공화주의자(PRR, DLR, PRC)들은 가톨릭/왕당파와의 반목으로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유럽의 정치 스펙트럼을 (독특한 포지션인 전체주의를 제외하고) 좌우 1차원으로 분류하면 대략 '사회주의&아나키즘-공화주의-자유주의적 입헌군주주의 / 보나파르트주의-봉건주의 왕당파' 정도가 된다. 스페인 가톨릭 교회와 공화주의자들의 반목은 이런 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2공화국 헌정 질서는 내전 이전에는 극단적인 좌우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우선 제2공화국 정부를 세운 공화파 내부에도 자유주의/공화주의를 대표했던 양대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DLR 계열)나 마누엘 아사냐(IR 계열) 같은 인물들도 많았고 이들은 당연히 본격적인 좌익 인민 공화국 정권을 기대했던 사회주의자들과 크게 충돌했다. 또한 공화국 초창기(1931년~1933년)에는 AR의 아사냐 정권, 그리고 그후 2년간의 우파 정권때는 PRR의 레룩스 정권, 인민전선 총선 승리 이후에도 IR이 정권을 주도해서 온건한 공화주의적 통치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머릿수로만 따지면 좌파 내에서 가장 강력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무정부주의자 CNT 입장에서는 중앙 권력과 [[국민국가]]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했다. 이들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해봐야 큰 의미가 없다는 입장에서 다른 좌파, 공화파 정치 세력과 연대도 지극히 제한적으로 하며 1936년 내전 발생까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게다가 무정부주의자들을 차치하고도 [[사회노동당(스페인)|PSOE]]와 [[통합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POUM]], [[스페인 공산당|PCE]], UGT 등의 사회주의 좌파들 역시 서로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PSOE 내부의 프리에토를 필두로 한 온건파[* 자유주의 공화국에 온정적인 계파]와 라르고 카바예로의 강경파[* 급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띈 계파]간의 분쟁이 극심했으며 그와중의 공식적 산하 노동조합인 UGT와도 파벌투쟁이 지속되었다. 트로츠키주의과 좌파공산주의의 연합체인 POUM과 스탈린주의였던 PCE의 공산주의 내부 투쟁의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아울러 [[인민전선]]을 비판한다고 모조리 수구 꼴통으로 몰고 가기는 어렵다.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프랑코 정권]]이 굉장히 잔인한 정부 체제이기는 하지만 당시 스페인인들 전부가 인민전선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제2공화정 당시에도 1933년에서 1936년까지는 우파 정부가 다스렸고 공화주의 우파 계열은 1936년 선거에서 공화주의 좌파와 CEDA에게 표를 빼앗겨서 절멸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화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심지어는 동시대 스페인 극우 중 프랑코와 같이 국가군에서 싸운 인물들 중에서만 골라도 실패한 바르셀로나의 쿠데타 사령관이었던 마누엘 고데드, 그나마 스페인 군인들 중에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독일 국방군|독일군]]에게 칭송받은 후안 야구에, [[세비야]]를 먹고 남부에서 혼자 동네 왕초 노릇하다가 프랑코에게 깨갱한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의외로 처음부터 군부는 왕정이나 공화정 둘 중 어느 한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는 않았다... 라기보다는 그냥 별 생각이 없었다. 이념에 대한 충성도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케이포 데 야노는 스페인 제2공화국 개국공신이었고 프랑코의 동생으로 공군 장교였던 라몬 프랑코도 골수 공화파였지만 그래도 형을 따라간 특수한 케이스다. 카나리아와 포르투갈에 짱박힌 프랑코와 산후르호를 대신해 사실상 본토에서 쿠데타를 주도한 에밀리오 몰라도 처음에는 그냥 별 생각없이 공화정을 지지했다가 그를 따라 참여한 카를로스파를 기겁하게 했다.(왜 왕당파가 공화주의자와 함께 쿠데타에 참여했냐면 딱히 연줄이 없었기 때문) 몰라가 산후르호 사후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군부 최선임자 미겔 카바네야스도 공화주의자였고 그 아들은 아예 대놓고 PSOE의원이었다가 아버지가 힘이 없어서 지켜만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코에 찍혀서 망명했다. 프랑코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 생각없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왕당파 소속 지지자들이 칭얼대서 할 수 없이 왕정을 택한 것이다. 공화진영에 남은 군인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공화진영에 남은 군인들 중에는 물론 이념때문에 남기도 했겠지만 아무 생각없이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과 연줄이 없어서 그냥 남은 케이스도 꽤 있었다. 대표적인게 호세 미아하다. 내전 발발 당시 의외로 장성급 장교들 중에서는 공화진영에 남은 비율이 상당히 높았지만 그 아래 영관급 장교들은 주로 국민진영에 가담했다.] 등도 '좌익은 당연히 때려잡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왕정까지 복고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할 만큼 왕정이란 기관 자체에는 딱히 애착이 없었고, 팔랑헤 사상가 오네시모 레돈도[* 히스파니아 행동 카스티야 평의회의 창립자. 가톨릭 신자로써 가톨릭 국교화를 주장했던 팔랑헤주의자였다.], 라미로 레데스마[* 사실상 스페인 [[민족생디칼리슴]]의 창시자로 노동조합의 자가관리(다만 기업가들도 모두 참여하는 형식의 노동조합), 지방 직접민주주의등을 주장했으며 이후 레돈도와 같이 민족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JONS)를 세웠다가 팔랑헤랑 합당했으나 팔랑헤가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며 탈당한 적 있다. 종교적으로는 [[불가지론]]자였으며 그렇기에 전통왕당파등의 가톨릭주의자들과 사이가 꽤나 안좋았다고 한다.] 같은 본격 사상적 파시스트들에겐 왕정도 '퇴폐하고 썩어빠진' 청산해야할 적폐란 입장이었다. 공화주의 헌정 체제를 선호했던 우파 인사들 또한 충분히 있었다. 스페인 정치에서 공화주의가 좌파의 전유물이 된 것은 스페인 내전과 공화주의를 불온 사상으로 보고 말살하고자 했던 프랑코 통치 이후의 유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